강한 구심점으로 모든 요소가 정렬된 게임이 좋은 게임이다.
어떤 게임은 특정 주제의식을 중심으로 메커니즘, 디자인, 스토리텔링이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게임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플레이어는 일체감을 넘어 구성 요소의 합 이상을 경험하게 된다. 구심점이 약한 게임(특히 규모가 큰 AAA 게임은 후술할 제약으로 인해 주제가 명확하기 어렵다)이라고 해서 좋은 게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제의 깊이가 오래 기억에 남는 게임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같은 로그라이크 액션 게임을 만들더라도 성장을 키워드로 하면, 플레이어가 약한 존재에서 곱셈적으로 성장하며 압도적인 힘을 발산하는 경험을 설계할 수 있다. 반면 생존을 키워드로 삼으면, 노련한 모험가가 제한된 자원을 현지에서 조달하며 다양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경험을 디자인할 수 있다.
적부터 상상해보자.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적은 플레이어를 처음에는 억압하지만 점차 플레이어의 성장 지표가 되는 존재여야 한다. 플레이어는 강한 적을 이겼을 때 자신의 성장에 대한 만족감을, 실패했을 때는 부족한 성장에서 오는 무력감을 느껴야 한다. 이런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높은 체력과 방어력, 다수의 적 같은 캐릭터 스펙 중심의 디자인이 효과적이다. 반면 생존을 테마로 하면 적은 플레이어가 분석하고 공략해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가장 약한 적도 기믹 중심으로 설계되어 플레이어의 지식과 기술을 시험해야 한다. 성장 게임의 적이 준비되지 않은 플레이어에게는 벽처럼 느껴진다면, 생존 게임의 적은 항상 까다롭지만 대응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아야 한다.
미술의 문법 또한 주제에 맞춰 조정될 수 있다. 성장을 요구하는 적은 플레이어의 강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피격 모션을 강조하거나, 일정 데미지를 흡수하는 방어막 게이지와 같은 시각적 요소로 플레이어가 요구된 성장 단계에 도달했는지 명확히 알려줄 수 있다. 반면 생존을 위협하는 적은 공격 방법이나 공략 방법을 유추할 수 있게 설계되어야 한다. 예컨대 고슴도치 같은 적은 근접 공격을 반사하고, 방패를 든 적은 뒤쪽에서만 제대로 피해를 입히는 등 직관적이면서도 분석을 요구하는 디자인을 통해 캐릭터보다는 플레이어 본인의 성취감을 자극할 수 있다.
서사도 주제의식을 강화할 수 있다. 성장을 중심으로 한 게임이라면 플레이어 캐릭터를 처음에는 약하지만 잠재력이 큰 인물로 설정하고, 궁극적으로 압도적인 적을 이겨야 하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성장 자체가 매력적인 요소이기에 캐릭터 몰입을 위한 역할놀이(RP) 요소를 강조하는 것도 좋다. 캐릭터의 성장을 통해 스토리라인 또한 보상처럼 설계될 때 더욱 효과적이다. 생존을 중심으로 한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기술적 성장을 중시하기 때문에 캐릭터성을 줄여 다양한 숙련도의 플레이어가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유효한 전략이다.
위에서는 큰 개념을 중심으로 예를 들었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프로젝트에서는 "성장"이나 "생존"보다 더 구체적인 주제의식을 설정하게 된다. 이런 개념은 창작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각각의 해석이 개별적으로는 옳더라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 컴포넌트가 모이면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주제의 명료성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같은 생존 테마의 게임이라도, 이해와 대응의 쾌감에 중점을 둔 메커니즘과 생존을 위한 처절함에 중점을 둔 미술이 결합하면 둘 모두의 강점을 잃는 조합이 될 수 있다.
이는 협업 과정에서의 유의점이다. 일반적인 게임 개발은 기획과 개발 단계가 명확히 분리되지 않고, 기획의도조차 개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고도화된다. 게임은 설계되기보다는 정원 가꾸기(Gardening)처럼 성장하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중심 주제도 처음 아이디어 단계와 최종 단계에서 성숙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발에 참여하는 모든 인원이 이 게임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꾸준히 공유하고 논의해야 한다. 각 파트에서만 보이는 고유한 관점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Reference#
Risk of Rain 2 "거대한 자연에 맞서는 어리석은 인간의 투쟁"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다고 느꼈다.